이글루스 | 로그인  


증오. 프랑스의 현실

"사회가 붕괴될 때의 얘기야... 마천루에서 떨어지는 사람이한층 한층 떨어지면서 자신을 타일렀대.
아직까지는 괜찮아. 아직까지는 괜찮아. 아직까지는 괜찮아...."
 
1990년대 중반, 이렇다 할 새로운 영화 없이 중견감독들의 엇비슷한 작품들로 어렵게 명맥을 이어가던 프랑스 영화계에 충격적인 영화 한편이 등장한다. 바로, 스물 여덟살의 젊은 감독인 마티유 카소비츠가 자신의 두 번째 영화로 발표한 증오 라는 작품이다. 예리한 사회의식과 정교한 영화형식이 완벽한 조화를 이룬 이 영화는 그해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프랑스를 너머 전 세계적으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게 된다.

 
이 영화가 무엇보다, 최근 프랑스 사회에서 가장 커다란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이민2세와 인종차별의 문제를 우회하지 않고 정면으로 부딪치며 풀어간다. 즉, 파리 교오의 빈민 지역에 사는 (게토 같은) 세 젊은이들의 하루를 세심하게 따라가면서, 프랑스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폭력의 문제와 인종차별의 문제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특히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등 여러 대륙에서 건너와 프랑스 사회의 한 구석에서 곪아가고 있는 그들의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때문에, 영화에는 프랑스인들도 알아 듣기 힘든 온갖 욕설과 구어들이 난무하며, 프랑스인의 삶이라기보다는 이민자들의 삶이라고 해야 더 어울릴 파리교외 주민들의 비참한 삶이 가감 없이 묘사된다. 그러면서 감독은, 문제의 심각성을 알면서도 안일한 태도로 방관하고 있는 프랑스인들을 향해 이대로 가다가는 사회의 붕괴 밖에 없다는 주장을 직설적으로 토로 한다.

 
그런데 영화 증오 의 우수성은 단지 예리한 사회의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영화는 형식의 차원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보여준다. 일단, 아주 작은 에피소드들까지도 잘게 썰어서 영화 곳곳에 배치해놓은 서사구조가 돋보이며, 거기에 소소한 숏 하나까지 정확한 시간과 타이밍을 계산해 정교하게 구성한 편집 솜씨가 노랍다. 또, 화면만봐도 금새 대도시 교외의 현실을 그대로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세심한 미장센과, 언뜻 들으면 매우 거칠게 다가오지만 나름대로 많은 암시와 의미를 담고 있는 대사들의 선택도 뛰어나다 특히, 이 영화에서는 이야기의 사실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다큐멘터리적 효과가 동원된다.

 
먼저, 영화는 현대 프랑스 젊은이들의 이야기를 다룸에도 불구하고 흑백 필름을 사용해 르포르타주
영화와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이러한 흑백 화면은 한편으로는 영화의 주제인 사회적 대립구도를 암시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영화에 난무하는 거친 폭력장면들의 강도를 완화시키는 다중의 역할을 수행한다. 또한, 영화는 인트로 씬에서 실제 시위 장면을 촬영한 뉴스릴 필름을 그대로 사용했는데, 이 역시 영화의 사실감을 높이는데 한몫을 한다. 그밖에도 영화는 레게 음악과 힙합댄스 등을 적절하게 삽입하면서 프랑스 이민2세들만의 감수성을 표현해냈다. 특히 프랑스 백인들에게는 전설적인 샹송인 에디트 피아프의 "나는 후회하지 않아 Je ne regrette rien"를 힙합풍의 노래로 편곡해 삽입한 것은, 바로 프랑스의 전통적인 문화보다 오히려 미국의 주변부 문화에서 더 큰 동질감을 찾는 이민2세들의 취향을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영화 증오 는 강렬하고 거친 일차적 느낌과 달리, 고전적인 명작의 미덕을 두루 갖춘
모법적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주제와 형식에서 모두 깊은 연구가 이루어졌고 감정의 절제와 발산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한, 완성도 높은 작품이다. 1980년대 이후 프랑스 영화의 형식미만 집요하게 탐구하거나 아니면 표현의 차원은 무시한 채 어설픈 형식 속에 무거운 주제만을 담아내는 작품들이 양산됬다. 이 영화는 프랑스 영화가 갇혀 있던 그 길고 긴 자승의 터널에서 빠져 나와 형식과 주제라는 두 갈래 길을 훌륭하게 통합해냈고, 프랑스 영화자체의 침체된 분위기를 쇄신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영화 증오 는 프랑스 국민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프랑스의 젊은이들의 대다수가 오랫동안 갈구해온 소망 하나를 이루어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by 프랑스 영화의 이해.
written by 김호영

by 예쁘리아 | 2008/01/02 00:12 | Movie | 트랙백 | 덧글(0)

트랙백 주소 : http://shinhwa361.egloos.com/tb/1222839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

:         :

:

비공개 덧글

◀ 이전 페이지          다음 페이지 ▶